쉬운 목차
1. 공부할까 수련할까?
무엇을 해야 궁극에 이를 수 있을까요? 공부해야 궁극에 이를 수 있을까요? 수련해도 지혜에 들 수 있을까요?
길을 가다 보면 방향을 잃고 헤맬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산속 깊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현재 있는 그곳에서 다시 방향을 찾아 나갈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방향도 모르겠고 현 위치도 전혀 알 수 없다면,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방향도 알 수 없고 현 위치도 모르면서 앞으로 길을 계속 가려고 한다면, 결국 길을 잃고 미궁에 빠져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왔던 길을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걸 낭비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걸 선택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동안 배우고 익혔던 모두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수십 년 동안 수련하면서 건강은 많이 좋아졌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건강이나 챙기려고 이 길에 들어왔나 하고 의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왜 이 길에 들어섰지?’ 하며 뒤돌아볼 때가 있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면서 느낀 게 참 많습니다. 혹시라도 저 같은 분이 또 있지 않을까, 이런 염려로 그동안 참 많은 글을 써왔습니다.
우리는 개혁이니 개벽이니 하는 말을 참 두려워합니다. 혁명이니 혁신이니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위축되기 쉽습니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낯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혁신이나 개혁이 없는 역사를 기대하기 어렵듯이, 한 개인도 혁신을 넘어서는 개혁이 없다면, 새롭게 거듭난 자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요즈음은 세상이 참 빨리 변하다 보니 혁신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기는 합니다. 이런 말을 많이 듣고 또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혁신을 위해 자신을 개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 혁신하지 않고, 세상을 개혁하려 한다면, 이는 무모한 짓이거나 가식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개혁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르는 길은 언제나 무섭고 가지 않은 길은 늘 낯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려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하고 더 큰 용기가 필요하며 나침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가며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바른 질문에 옳은 답을 찾을 수 있어야 자기 자신을 개벽해야 할 이유와 각오가 서게 됩니다.
1) 수련을 오래 했는데 별로 진척이 없다면
수련을 계속해왔는데 별로 변한 게 없다든지, 수행이 어려워 중도에 포기했다면, 이 방법이 정말 옳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국선도나 요가 기공을 하고 있다면, 내가 왜 이 수련을 시작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물론 건강을 위해 수련을 시작했고, 지금 그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렇다면 계속해서 부지런히 운동하고 수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찾아가는 공부를 하고 싶어 입문했는데, 아직도 수련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수련이나 수행이 아니라, 공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공부는 수련이나 수행과 뭐가 다릅니까?
수련은 단련하고 닦는다는 말입니다. 공부는 근원을 찾아 진리를 밝힌다는 말입니다.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또는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몸을 단련해야 하고 마음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호흡은 단련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마음 역시 닦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특히 마음은 닦는다고 닦이는 물건이 아닙니다. 내려놓는다고 내려놓을 수 있는 짐짝도 아닙니다. 마음은 본래 없는 것이라서, 없다는 걸 이해하면 그만입니다. 호흡을 훈련하고, 몸을 단련하며, 동작을 익히고 자세를 다듬는 것은 그 나름의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지혜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 공부를 한다는 의미는
공부하려면 숨은 쉬고, 몸은 놀리며, 의식을 열고 깨어나는 길로 가야 합니다. 국선도나 요가, 기공은 물론 모든 도법은 지혜를 찾아가는 길이며 이는 자연도법입니다. 자연스러워야 하고 고요함을 유지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향해 들어가는 길입니다. 왜 자기를 찾아 들어갈까요? 자기 자신이 모든 이치와 지혜의 처음이자 끝이기 때문입니다.
자연도법이란, 몸을 움직이고 숨을 쉬는데도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요함을 유지하는데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숨은 쉬는 거다. 몸은 놀리는 거다. 이러한 몸과 숨을 바라보면, 의식은 저절로 열리고 깨어난다. 이것이 공부 방법이다.>
2. 국선도의 공부법
국선도 공부도 숨과 몸을 바라보고 느끼며 알아차려 가면서 시작합니다. 그래야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함을 유지해야 의식이 열리고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맑고 밝게 드러나는 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무엇이든 재미없으면 포기하기 쉽습니다.
숨은 쉬어야 자연스럽고, 몸은 놀려야 이완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워야 편안하고. 편안해야 이완할 수 있습니다. 이완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몰입할 수 있습니다. 몰입할 수 있어야 고요함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고요함 속에서 의식이 열리고 깨어납니다. 그러면 맑고 밝게 드러나지요. 이것이 지혜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1) 밝음의 실천적 공부는
숨과 몸, 그리고 의식으로 밝음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밝은 덕으로 돌고 돌아가는 이치에 참여하는 길이 공부입니다.
밝음의 근원적 공부는
의식을 열고 깨어나 나를 이해하고, 나의 또 다른 모습인 세상 삼라만상과 조화를 이루며 지혜를 펼쳐가는 길입니다.
이를 일러 밝 받는 법이라 하고, 밝돌법이라 하며, 이 길을 선도라 하고 현재는 국선도라 합니다.
2) 선과 도의 의미
선이란?
밝음과 따스함으로 생명을 보듬는 태양을 닮은 사람을 뜻합니다.
도의 의미는?
밝은 덕을 펼쳐가며 살아가는 삶의 길을 뜻합니다.
선도를 <밝 받는 법>이라 하고, <밝돌법>이라 하는 이유는,
밝음을 받아들여, 생명을 살리는 사람의 길이며, 밝음의 덕을 두루 펼쳐가는 삶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공부는 훈련하고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단련하며 극기한다고 공부가 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단련과 훈련도 도움이 됩니다. 선수들의 훈련이나, 학생들의 학습과 공부는 전혀 다른 길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근원적인 공부는 닦으며 단련하는 게 아니고, 배우고 익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학생이 아니고, 선수도 아닙니다. 그래서 학습이나 수련을 통해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젊은 시절 한때, 합기도와 검도 지도자로서 도장을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기술을 연마하고 도검을 단련하며, 마음이 곧 도다. 검선일치를 이룰 때까지 부단히 닦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마음은 도가 아닙니다. 마음은 환영일 뿐입니다. 마음의 뜻도 모르면서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검선일치를 이루는 공부방법도 모르면서 검선일치를 스스로 터득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직도 쉬는 게 뭔지, 자연스러움이 뭔지 모른다면, 그래서 아직 고요함과 깨어있음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러면 지금까지 왔던 길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혁명을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부수어야 합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새로운 길로 찾아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쉼과 자연스러움 없이 고요와 이완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고요함 없이 몰입할 수 없고, 몰입 없이 고요함을 유지 할 수 없습니다. 몰입하며 고요함을 유지할 수 없으면, 깨어날 수 없습니다. 이완의 몰입 없이 단화기 없고, 고요함 없이 단침 없습니다. 단화기와 단침 없이 고요함을 유지 할 수 없고, 고요함을 유지 하지 못하는데 궁극에 이르는 공부를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적적성성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궁극에 이르는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요와 깨어있음이 지혜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원리는 이렇게 복잡한 것 같지만, 핵심은 하나 뿐입니다.
<고요를 유지하면 스스로 다 이루어진다.>
그동안 공부하는 이야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공부하신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