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란 무엇인가

경계에도 서지 마라

 

들어가는 말

 

경계에 서라고 이야기합니다. 경계를 긋고 분별하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우며 익혀왔습니다. 그런데 그 경계로부터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불합리와 무지가 생겨난다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경계가 무엇인데 아픔과 괴로움 뿐 아니라 무지까지 만들어 낸다는 건가요?

 

 

 

  1. 경계란 무엇인가?

 

 

의식이 의식할 대상을 의식하면서 분별하여 나누는 것을 경계 짓는다 하고, 또 이를 경계의 세계라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현상이나 경험은 의식하며 받아들여야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외부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누어야 하고, 외부의 세계를 내가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으로 분리하여 의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누고 분별하는 걸 경계라 합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세상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의식하기에 세상도 드러나고, 받아들이기에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의식하기에 세계도 드러나고, 경계도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세계를 나누어 별개로 인식해야 받아들일 수 있어야 경험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야 하니 이게 모순입니다. 그래서 경계는 모순에서 비롯합니다. 또 그 무엇도 경계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게 이 현상계입니다. 그런데 경계를 지을 수 없는 세계를 왜 경계를 지어가며 분별해야 하는 걸까요?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의식을 주관이라고 가정한다면, 인식할 수 있는 그 모두는 객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누어 놓고 나를 설정해야 외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게 경계의 모순입니다. 그런데 나와 대상은 결코 둘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경계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온통에서 분별로 나누어진 개념에 불과하고, 분별하는 의식은 개체에서 분리될 수 없기에 이러한 경계는 모순입니다. 의식한다는 건 외부를 의식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거고, 외부를 의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식과 외부가 하나라는 뜻입니다. 의식하기에 경계가 생겨나지만, 경계가 생겨났다는 건 의식에서 벗어났으니, 이게 참 모순입니다. 그러니 경계는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1. 경계는 모순이다.

 

 

나 아닌 것은 나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경계를 그어야 의식할 수 있지만, 의식한다는 건 경계가 없이 의식과 외부가 하나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의식과 외부는 하나에서 비롯하기에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경계가 있어 경계로 의식하는 게 아니라, 의식하기 위해 경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의식하기 위해서는 경계가 생겨나야 하고, 경계가 생겨나면 의식에서 벗어납니다. 또한 경계가 사라지면 의식할 수 없으니 경계는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인식한다는 의미는 의식이 창조한 허상을 보며 현실이라 착각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허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랍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해봅시다.

 

내 의식이 따로 있고, 의식되는 외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핵심입니다. 세계가 존재하기에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게 아니라, 의식이 분별하기에 외부도 생겨나고 경계도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외부를 의식할 수 있고, 세계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세계와 의식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니 경계가 생겨나면 세계는 사라져야 합니다. 즉, 의식하지 않으면, 나는 물론 세상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와 의식, 의식과 외부, 또한 나와 세계는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식과 존재, 나와 세상은 본래부터 하나라는 뜻이니 경계라는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런데도 의식하기 위해서는 의식으로부터 외부를 분리해야 합니다. 이 말은 내 눈으로 나의 눈을 볼 수 없으니 다른 사물인 거울을 통해서 내 눈을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거울 속에 있는 그 눈은 결코 내 눈일 수 없는 허상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지만, 결국 세상은 그런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와 세상, 그리고 존재 역시 거울 속에 비친 허상, 즉 의식이 만들어 낸 환영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는 걸까요?

 

경험하고 싶어서! 생명으로 여행하고 싶어서! 진화도 해보고, 공부도 해보고, 꿈도 꾸어보고, 깨어도 보고, 기쁘고 즐거운 삶이라는 걸 살아도 보고!

 

하지만 이 모두가 허상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살아가되 삶에 구속되지 않아야 삶이 아니겠어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경험의 세계를 의식하며 누린다는 건, 늘 경계 지으며 분별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경계로 인해 자기 자신이 드러나고, 그 드러난 자신을 확인하며 정체성을 갖기에 경계가 전혀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물론 세상도 경계로부터 생겨나지만, 그 모두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 경계는 나로부터 그어진다

 

 

현실 세계에 돌아와 봅시다. 시시비비나 분별이 일어난다는 의미는 내가 이미 옳고 너는 그르다는 경계에 서 있다는 뜻이니,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내에게 시비나 분별이 없으면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나 역시 본래부터 있어서 나를 의식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의식하기에 나는 물론 세상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니 경계 자체가 바로 모순이라는 모순에 다다르게 됩니다.

 

​일상에서는 일어나는 그 모두는 의식의 환영일 뿐이고, 의식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경계를 걷어내면, 어리석음도 없고, 탐욕도 없으며, 중생은 물론 성인도 없습니다.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고, 잘남도 없고 못남도 없습니다. 내가 만들어 낸 경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시시비비와 분별이 일어나고, 거기서 괴로워지는 것이라면, 이해하시겠습니까?

 

말이 좀 어려운가요?

 

분별로 세상을 나누는 나로부터 옳고 그름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옳고 그름이 본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옳고 그름의 경계에 서있기에 세상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결국 뭐예요? 나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억지처럼 들리나요?

 

분별없이 살면 삶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요? 나는 그런 바보천치가 아니라고요? 강하게 반박하고 싶은가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현혹하는 거냐며 호통이라도 치고 싶어요?

 

 

 

  1. 국선도 공부 역시 나를 찾는 공부

 

 

국선도 공부를 왜 하나요? 국선도를 공부하다 보면 경계가 자꾸 사라집니다. 결국 내가 설정하고 선택하며 경험하는 게 세상이고, 이게 바로 삶이라는 이해가 가능합니다. 나 자신의 경계로부터 생겨난 세계고 경험이라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설정한 세계에 눌려 힘들어하고, 내가 선택한 경험을 아프다며 도망치고 있구나!

 

나는 ‘나’라는 설정일 뿐이고, ‘나’라는 선택을 받아들이며 경험하는 의식일 뿐입니다. 나도 없고 세상도 없지만, 의식하기 위해 의식할 뿐이구나!

 

​세상이 있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의식하기에 모두가 가능합니다. 내가 경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게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를 다시 선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힘들고 괴로운 게 다 무엇이지요? 뭐가 되지 못해서 힘들고, 뭘 갖지 못해서 열등감을 느끼고, 뭐든 뜻대로 안 된다며 괴로워하는 건 또 무엇이지요?

 

100만 원짜리 가방을 명품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놓고 3000만원에 사려고 줄을 서며 무슨 생각을 하나요? 맛집이라며 덩달아 긴 줄 뒤에 서며 어떤 기대를 하는 것일까요? 남들이 그렇게 하니 나도 따라서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그러는 거라면, 허무하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한 쪽으로 몰려가니 나도 따라 군중 속으로 들어가 성토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지요? 아니라고요? 나는 내가 판단해서 외치는 거라고요?

 

그을 수 없는 것에 경계를 긋고, 그 경계의 줄 위에 서서 바라보면, 모든 게 나누어질 수밖에 없으니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중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무척 외로울 것 같아서 경계의 줄 위에라도 서서 광대 노릇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혹시 군중 속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외쳐본 적 있나요? 남과 다투거나 토론하며 싸워 본 적 있나요? 안약 그때 경계가 사라졌다면 함께하고, 경계에 서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군중을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경계에 서서 상대방과 싸우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선택은 없습니다. 알면서도 계속한다면, 그건 어리석음이고, 나도 죽고 상대방도 죽이는 행위입니다. 아직도 투쟁이 성행하고, 전쟁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어리석음을 반복해 왔고 계속 반복할 것입니다. 남의 잘잘못을 가려내고, 모여서 성토하고, 심지어는 그를 내쫓고, 죽이기를 반복해 왔지만, 분열은 계속되고 경계는 자꾸 늘어가니 분노와 좌절로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높고 단단한 경계에 깔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갔고, 예수도 그렇게 갔으며, 경계를 인정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 역시 그렇게 수없이 갔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마녀가 되어 갔고, 반역이 되어 갔으며, 명분에 묻혀 수없이 가고 또 갔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잘못했으니, 나는 심판할 뿐이니,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며 스스로 위안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헛짓을 하며 위안하려고 또 하나의 허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요?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야말로 허상 중의 허상입니다. 이 허상에 의지하며 인간은 위안을 받으려 하고, 마음에 기대려 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의지하려 하기에 사람은 결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괴로움이나 절망 같은 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음이란 허상 중의 허상인데, 모두가 마음 마음 하면서 마음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맺는 말

 

 

공부한다는 게 뭘까요? 아니 왜 공부를 해야 할까요?

 

혹시 학습하는 걸 공부라 착각하는 건 아닐까요? 학습이란 배우고 익힌다는 뜻입니다. 배운다는 말은 몸에 배도록 한다는 뜻이고, 익힌다는 말은 습성이 되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공동체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그런 학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리라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공부는 무슨 뜻이고, 공부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공부란 천지의 근원을 밝힌다는 의미고, 결국 천지는 나로부터 시작되기에 나를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즉 학습은 외적이고 공부는 내적이라는 뜻입니다. 경계는 외적이고 성찰은 내적입니다.

 

경계에 서지 않아야 세상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고,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별과 분리가 아니라, 하나를 이해해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우아일체라 하고, 주객일체라 하며, 하나라 합니다.

 

​공부의 과정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는 꿈에서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그 모두가 나로부터 비롯하여 본래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를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이가 공부해야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실제하고 세상이 실체라는 생각, 뭔가를 이루어야 하고 뭐가 되어야 한다는 착각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우주며 신이고 본래입니다. 본래로서 그대로 천국입니다. 착각에서 벗어나야 다시는 지옥을 이 지구에 건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부하며 성찰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상과 이념, 그리고 믿음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는 걸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이제는 알 수 있잖아요?

 

꿈에서 깨어나 아름다운 세상을 펼쳐가기를, 이번 여행도 기쁘게 누려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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