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누굽니까?”
“하하하!”
질문에 답은 하지 않고, 너털웃음을 짓고는 또 다시 빤히 바라본다.
“저는 심각한데 왜 웃으시는 거죠?”
“질문이 잘못됐어요. 다른 사람이 궁금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궁금해야지요.”
“네? 제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솔직하고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말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잖소. 솔직함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오. 이 늙은이가 아무리 진실을 말한다 해도 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거짓과 다름없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더라도 곧이곧대로 그걸 받아들이면 그 거짓은 사실처럼 행세하지 않던가요?”
“……”
이상한 말만 늘어놓는 이 노인이 궁금하다.
노인의 눈이 멀리 허공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연다.
“모든 생명체는 다 이유가 있어 오고가는 것이고,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며 세상을 누리는 게 아니겠소? 하지만 사람들은 늘 상대방이 궁금하고,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많지 않아요. 모든 생명체는 누구나 자기를 찾아 여행을 시작한 것이고,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삶이라는 길을 가는 게 아니겠어요? 님께서도 지금 그걸 찾아 이렇게 여기 와 계신 게 아니오?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가르쳐 준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바로 소명이고, 생명의 길이고, 삶의 이유 아니겠소? 자기를 이해할 수 있어야 진리에 참여할 수 있고, 그래야 비로소 자기 자신도 경영할 수 있는 것이고, 세상에 나가 두루 경영하더라도 허물이 없는 것이오.”
“세상을 경영하는 사람은 지금도 널려 있지 않나요?”
“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경영한다면서 자기 욕망을 운용할 뿐이니 후회가 남는 것이오. 그리고 세상은 경영하는 게 아니오. 세상이든, 생명이든, 모두가 ⁴자기 자신을 찾아갈 뿐이지요.”
“욕망이 있고 야망이 있어야 삶을 살아갈 수 있고, 통치자가 되고 경영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님께서 늘 만나는 세상이 그런 착각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과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오? 통치자나 지성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탐욕에 눈멀고 귀먹어 자기의 본분을 잊고 살아가고 있잖아요.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통치하려는 사람들을 보세요. 자본주의 공산주의, 좌파 우파, 진보 보수, 심지어는 피부색이나 종교로 서로를 갈라놓으며 이념이나 사상으로 무장하고, 신념으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사람들 아니오? 그러면서 서로를 불신하도록 조장하고 상대방의 불만을 이용해 자기의 욕망을 채워가면서 이상세계를 건설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오? 이념이나 신념, 그리고 성향까지 나누어 놓고 하나만을 선택하라 요구하고, 편향적인 분별로 선을 그어 놓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내편이 아니면 물리치고, 나와 다르면 없애겠다고 극단으로 치닫는 세상이 아니오? 어느 집단이든 언제나 둘로 나뉘어 늘 분쟁과 전쟁을 일삼아 왔지요. 이런 세상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게 인간이고 그게 세상의 이치 아닌가요? 그게 수만 년 동안 인류의 생존방식이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혼자만 안 그런 척하시며 고고하게 버티려 하세요?”
“다 좋아요. 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일어나서 무엇을 보게 되던가요?”
“전 그런 적 없어요.”
“나와 직접 관련 된 게 아니라면,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던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요? 자신을 더 들여다 보세요. 정당성, 합리성, 우월성, 타당성 등의 잣대를 만들어 놓고 세상을 제멋대로 재단하며 자기의 신념대로 세상을 분별하며 살아오지 않았나요?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기에 인간세상이 무지로 계속 치닫고 있잖아요.”
“지금까지 수많은 변화를 이루며 세상이 발전되어 온 게 아닌가요?”
“개혁은 서서히 이루어 지는 게 아니오. 의지만 있다면 개벽도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있어요.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오.”
“선생님은 왜 개벽을 하지 않는 거요?”
“왜 자꾸 남에게 관심을 돌려요? 남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하면 개혁은 영영 할 수 없어요. 자기 자신을 봐야 개벽을 하든, 혁신을 하든, 뭐라도 할 수 있을 게 아니오. 자기 자신은 개혁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개혁하려는 자는 거짓 선동자일 뿐이오. 지금까지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사람들이 그랬잖아요.”
“선생님운 개혁을 하셨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님은 자기 자신의 개혁보다 남의 개혁이 더 중요한 것 같네요. 그런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자기보다는 남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거요. 저 사람은 뭐가 문제일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참 쉬워요. 상대의 허물을 찾아내며 나와 다른 걸 용납하지 않으려 하잖아요. 다름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다름을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서 상대방을 모함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폭력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득실대잖아요. 이게 인간들의 어리석음이고 탐욕이 아닌가요? 내편이 아니면 무자비하게 짓밟는 그런 세상이 정상인가요? 분열을 일삼으며 파벌을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한지, 전쟁까지 불사하며 살육을 정당화하는 세상이 옳은가요? 정치한다는 사람들을 봐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졸하고, 귀 열고 들을 수없을 만큼 악다구니하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내편이면 무조건 옳고, 내편이 아니면 절대로 받아드리려 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아이들까지도 편 가르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일삼으며 ‘왕따’니 ‘갑질’이니 하는 이상한 문화까지 유행시켜 가잖아요. 맑고 밝게 성장해야 하는 어린이까지 폭력과 탐욕에 젖을 수밖에 없는 문화와 문명이 올바른 가치일까요? 어른이라는 사람들까지, 심지어는 지식층이라 우쭐대는 사람들까지 편을 가르며 상대를 무시하고, 집단을 조직화하며 자기 자신의 탐욕을 충족하기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그런 세상이 어떻게 지속가능할 수 있지요? 노인들마저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돌아볼 좋은 때를 허비하지요. 돈을 벌지 않으면 초라해질까봐 모두가 전전긍긍하는 사회가 추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어린이와 탐욕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젊은이가 득실대는 사회, 지도층은 물론 노인마저도 존경받을 수 없는 나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이젠 아무 이유가 없어도 대중을 상대로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까지 난무하기에 이르렀어요. 가장 심각한 것은 문화와 문명이 폭력과 탐욕을 정당화하고 미화한다는 사실이오.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나 영화마저도 폭력과 탐욕을 소재로 다루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어요. 이 모든 것이 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참극이 아니겠어요? 나 자신이 그러하듯, 우리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에게는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어요. 자유롭게 꿈을 꾸고 뜻을 펼쳐가며 살아갈 자유의지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소중한 절대권리지요. 나의 자유의지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생명체의 자유의지도 존중해 주어야 하기에 함부로 다른 생명체를 해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말이오. 지적생명체라 우쭐대면서 지적 어리석음과 이성적 탐욕이라는 모순에 의해 스스로 붕괴된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생명체는 물론, 행성마저 사라져야 했던 수없이 계속되어온 우주의 역사에서 이젠 교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행성의 운명은 외부에서 재앙이 다가오는 게 아니오. 지적생명체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멈추기에는 이젠 너무 늦었다는 사실에 너무 안타깝고 참 슬퍼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건가요?”
“자기 자신을 들여다 봐요. 나와 남이 다르다고 느낀다면, 그건 나를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뜻이니, 개벽을 해서라도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어요?”
“나를 찾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나를 찾으면 내가 없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뿐이오. 나는 없어요. 나는 영혼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오. 정체성도 아니고, 자아도 아니며, 무아도 아니오. 무엇이라 이름하는 순간 그것에 매여 살아가게 돼요. 그게 삶이라는 환영이고 관념이지요. 세상에 실제로 실재하는 실체란 없어요. 이게 나의 의미고 나의 모습이오. 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이것 뿐이오.”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해오던 노인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친근해진 기분까지 든다. 지금 뭐가 뭔지는 잘 들어오지 않지만, 노인의 푸념 같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올곧은 충고 같고, 어머니의 따뜻한 당부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갑자기 나온 질문이다.
“어떻게 죽고 싶어요?” 노인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묻는다.
“네? 왜 죽음을 알아야 하지요?” 동문서답하는 이 노인은 무얼 말하려는 걸까? 짐작은 가지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어떻게 죽고 싶어요?” 노인은 확인해야겠다는 듯이 다시 질문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언제 죽고 싶은지,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 지에 대해 먼저 숙고해 보세요.”
“어떻게 살고 싶은 지를 알고 싶은데, 왜 죽음까지 알아야 하지요?”
“삶과 죽음이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시 숙고하라는 게 아니겠어요?”
“…..”
“어떻게 살고 싶은 지를 물으며 방법 만을 찾게 되니,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 만 중요하고, 어떤 직업을 갖느냐 이것만 중요하게 되었잖아요. 무엇이 내게 어울리는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숙고해 본 적이 없으니, 하면서도 하지 못하고, 가면서도 가지 못하는 것이오. 세상에 일이 난무하고, 직업이 지천이니, 고통과 괴로움이 세상을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잖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도 없고 직업도 없어야 하는데, 일 뿐이고 직업 뿐인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오. 창공을 날아가는 저 새를 보시오. 광야를 뛰노는 저 말을 보시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도 늘 자유롭지 않나요?”
“그야 저들은 지적인 생명체가 아니잖아요?”
“지적인 생명체라면 더 기쁘고 더 즐겁게 세상을 누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 무엇을 하든 일이라 여기지만 않으면, 하는 모든 것은 놀이고 노래일 뿐이지요. 업이 무엇이오? 짊어져야 할 업보, 즉 죄라는 뜻이잖아요. 직업을 갖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취미를 가지면 되고, 그를 통해 나를 찾아가는 길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지적 생명체는 재밌는 놀이도 다 일이라 여기고, 마땅히 해야 할 경험도 모두 업이라 여기지요. 그래 놓고 따로 여가를 즐긴답시고, 더 열심히 일을 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더 험난한 업장을 짊어지고 살아가잖아요. 우리가 왜 생명으로 여기를 찾아 왔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하는 모든 것은 일이 되고, 마땅히 해야 할 경험마저도 업으로 둔갑하니, 무작정 앞을 향해 질주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잖아요. 일을 하고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일에 매이고 직업에 갇힐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지요? 일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게 아닌데, 직업이란 인간의 경험일 수 없는데, 모두가 일에 매달리고 직업에 목숨을 걸어요. 모두가 그렇게 산다고 나도 그렇게 살고, 남들이 그런다고 나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면, 지적 생명체가 짐승보다 뭐기 더 지적이라는 건가요?”
한참 혼자 이야기를 하던 노인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먼 길을 노인과 대화를 하고 싶어 찾아왔는데, 이 늙은이는 나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는 건가? 괜한 부아가 일어난다. 그런다고 쉽게 물러날 내가 아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죽고 싶어요?”
“난 죽을 수 없어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