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목차
여행자는 여행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여행자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철저한 여행자라서 여행을 떠날 수 없다.
모든 생명은 여행자다.
이 지구라는 작고 아름다운 행성을 찾아온
나는 여행자다.
사람도 그렇고, 개도 그렇고, 사자도 그렇다.
나무도 그렇고, 꽃도 그러하며,
운석 또한 다르지 않다.
모두가 이 작고 아름다운 행성, 지구를 찾아온 여행자다.
내가 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제일 궁금하다. 궁금해서 미칠 정도가 되면, 다른 사람을 만나러 외출하고 여행도 한다.
혼자 지내다 보니 거울을 볼 수 없어 외출할 수밖에 없다. 거리에 나가고, 동호회에 나가며, 지인을 만나면 수많은 거울을 볼 수 있다.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어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는 외출한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나의 거울이라서 좋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거울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사람을 보면, 그래 저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지! 남의 흉을 보는 사람을 보면서 그래 저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인데 어쩌면 좋지? 불평불만을 일삼는 사람을 보면, 그래 바로 내 모습이네! 하면서 반갑게 맞이한다. 내 편 네 편으로 나누어 놓고 내 편이라서 무조건 좋고, 네 편이라서 무조건 싫은 꾼들을 보면서, 그래 저게 내 모습이지! 찌질이도 내 모습이고, 허풍쟁이도 내 모습이며, 탐욕주의도 내 모습이고, 배신자도 내 모습이다. 그런데 지식인이라는 집단, 전문가라는 집단에서도 따돌림이 만연하다고 한다. 그래! 세상에서 제일 못난 저 모습도 내 모습이 맞다. 하지만 왕따나 갑질만큼은 제발 내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왕따나 갑질을 일삼는 짐승보다도 못한 사회, 남의 자유를 함부로 빼앗고 짓밟는 이기주의는 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제발 사라지길 간절히 빈다. 그렇지만 그게 바로 내 모습이라서 안타깝고 슬프다.
나는 철저한 여행자다. 그래서 여행을 떠날 수 없다. 부끄러워서 여행을 떠날 수가 없다. 세계인들이 신성시하는 성지는 부끄러워서 차마 가지 못하겠다. 세 종교가 서로 죽이고 죽이면서 차지하려고 하는 저주받은 땅이 성지라니? 고대 유적지라 하는 곳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수만 명의 군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아무 이유 없이 살육하던 인간 사냥터가 유적이라니? 수백 만 명을 도륙하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던 탐욕스러운 전쟁의 미치광이를 영웅이라며 세워 놓은 동상이나 유물이 기념비라니? 나는 철저한 여행자라서 그런 여행만큼은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가끔은 나도 여행을 떠난다.
아내가 남들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건 나도 싫다. 나도 가끔은 어리석은 여행을 떠난다. 치욕과 어리석음의 현장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때마다, 철마다 해외여행을 다니지 않으면, 같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끼리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아내가 남들과 잘 소통하기를 바란다. 별 의미 없는 줄 알면서도 아주 가끔은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나도 속물이 맞다.
너무 궁금할 때는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이 늘 궁금하고, 너무너무 궁금하다. 나 이외는 조금도 궁금하지는 않다. 내 땅 아닌 이국땅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오직 나 자신이 궁금해서 나를 향해 여행할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이 너무 궁금하면 나를 찾아다니며 거울을 본다. 세상에 널려 있는 나를 만나러 외출하고 거울을 보며 나를 찾는다. 내가 너무너무 궁금해서 미칠 정도가 되면, 내 모습을 보려 여행길에 오른다. 내 다양한 모습을 보려면, 거울을 마주할 수밖에 없고, 그 거울을 맞이하기 위해 외출하고 여행할 수밖에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나의 스승이고, 마주하는 사람마다 나의 거울이라서 나는 외출하고 여행한다.
나는 내가 너무 궁금해서 이 지구를 찾아온 여행자다!